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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7-18 18:13 조회5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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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태(역사디자인연구소) 

 

계기 

우선 갑자기 북촌 이야기를 풀어내는 까닭을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북촌은 익히 알다시피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율곡로 북쪽으로 조선시대에는 왕실, 유력 양반층이 살았고, 근대에 들어서는 교육열의 중심지였고, 2000년대 들어 한옥이 다른 주거문화로 주목받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갑신정변의 발발지, 3.1운동 기의지, 해방정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필자가 북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오랫동안 연구원으로 있던 북촌 계동에 있던 역사문제연구소가 2015년 이사하면서였다. 그동안 국제정치사에 관심을 두어오다가 이사 전에 기록을 남기는 차원에서 누군가로부터 글을 청탁받게 된 게 계기였다.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 과정에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도시사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하였고, 이후 도시사, 지역사라는 시야에서 서울, 지방으로 눈길이 갔다. 서울시와의 마을만들기 사업도 도움이 되었다. 그 과정에 크게 느낀 건 모든 개별적인 것이 가장 본질적이다는 점이다. 북촌이 한국근대사를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앞으로 쓰게 될 몇 가지 주제는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다르게 보려는 노력

호기심이 중요할 것같다. 관심의 정도와 방향이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리 작은 것에도 세계가 담겨 있다. 창문가에 심어놓은 블루베리 화분 사이에 핀 잡초에 대한 관심과 우크라이나전쟁이나 코로나 대응, 정권 교체에 대한 관심은 다른 세계의 일이긴 하지만,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크기 차이는 있지 않을 듯하다.

호기심을 가지면 문제가 설정되고 그것에 접근할 프레임이 나온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잡초가 날아왔을까? 대단한 생명력! 식물학 영역일까? ‘네박사에게 물어보면 다 알 수 있나? 전쟁의 배경이나 각 국가의 입장,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관심 정도는 한국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코로나는 또 어떤가?

모든 잡초를 다르게 볼 수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잡초는 단순한 잡초가 아니다. 전쟁과 코로나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자연현상과 사회현상, 국제관계가 담겨 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판단에는 사소함이든, 나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큰 문제이든... 모두가 나를 구성하는 세계라는 자각이 있다. 비로소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다. 늘 그렇듯이 왜? 라는 질문을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시점에 던진다면 모든 사물과 주변 환경, 사회, 세계는 다르게 보일 터.

다르게 보려는 것에 가장 방해 요소는 바로 익숙함이다. 익숙함은 편안함의 다른 이름이다. 세계에 대한 자각을 마비시킨다. 나와 세계 사이에 어떤 긴장도 없을 때이다. 무자극의 세계가 된다. 우리들은 항상 자신의 감각을 긴장 관계 위에 두기보다는 편안함 속에 두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잠시 불편한 관계가 있었더라도 얼마의 시간 뒤에는 다시 익숙해지게 되고 그에 맞추어 살아간다. 정상화 욕망이랄까. 나치의 유대인수용소 주변에 살던 평균 독일인들의 감각이 그렇게 만들어져 갔다고 한다.

서울 북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 있다. 한옥, 건축, 도시, 자본, 외국인, 게스트하우스, 골목, 학교, 등등. 이 익숙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풀어내기

역사학은 어떤 인물, 사건 등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진다. 갑신정변은 왜 북촌에서 일어났을까? 북학파와 개화파는 어떤 인적 연관을 갖고 있었는지? 북촌에 개화파가 살았다는데 그들의 집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갑신정변으로 죽은 정부 대신들도 이곳 북촌에 살았다는데 동네 사람들간에 일어난 살변(殺變)이 북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 궁금증을 시작으로 갑신정변과 북촌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

장소 상실을 현대인들의 특징으로 이야기한다. 자본은 돈과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을 원한다. 근현대 한국 사회는 국내에서 해외로, 해외에서 국내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도시 주변과 도시 중심지로, 도시 내에서의 이동을 격렬하게 경험했다. 교육과 경제적 이유로 수십 번의 이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장소에 대한 애착을 잃어버렸다. ‘장소 상실의 시대에 장소 회복을 주창하는 것이 이상스럽기도 할 정도이다. 그러나 내버려둘 수 없는 현실이다. 각자가 가진 다양한 장소기억들을 정리해 모으는 작업을 해보는 것이 요구된다. 각자의 장소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사진자료, 일기자료, 지도자료, 문서자료, 동영상 등 다양한 매체가 있다.

이것을 확장해서 북촌의 장소아카이브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 이곳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에 대해 좁게는 지번별로, 학교 단위로, 혼인 관계, 사회단체로, 성별로, 직종별로, 경우에 따라 민족별로도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적인 장소로서 북촌을 상상해보고 의미망을 만들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좋을 것이다. 어떤 장소를 읽고 기록하는 방법은 다양하며 역사학은 그 가운데 한 분야일 뿐이다. 건축학 혹은 지리학, 문학 등은 전혀 다른 방식의 장소기억 창고를 갖고 있을 것이다.

 

 북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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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으로 엮어낼 이야기들

북촌문화센터가 위치한 계동 104번지를 보자. 모두 553평이고 현재는 예담(104-1), 이도곰탕(104-2), 북촌문화센터 후면(104-3), 정담은보쌈(104-4) 4개로 필지로 나누어져 있다. 추적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의 이 집주인은 1912년 현재 김필한金弼漢이다. 그는 조선 23대 순조의 첫째 딸 명온공주(1810~1832)가 하가(下嫁)한 동녕위궁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명온공주는 세도정권기에 안동김씨의 김현근(1810~1868)과 혼인하였는데 동녕위궁은 그 궁호로써 관훈동의 죽동궁(SK빌딩)에 위치하였다. 고종은 즉위 과정에서 대왕대비 조씨의 남편 익종(순조의 아들)의 후사가 되었으므로 명온공주는 고종에게 고모인 셈이었다. 고종대에 김현근은 왕릉제사를 주관하고 경복궁 중건 당시 영건도감 제조로 활동하였고,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에서 가례도감 당상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현근이 사망한 다음, 동녕위궁 터 주인은 명성왕후의 친정조카 민영익으로 바뀌었다.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끝나고 여흥민씨 세도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따라 동녕위궁은 수송동(수송공원 일대)으로 옮겼다가 다시 계동 104번지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순조의 세 번째 딸 복온공주가 하가한 창녕위궁이 재동 삼양데이타시스템 자리에, 그리고 네 번째 딸 덕온공주가 하가한 남녕위궁이 계동 현대사옥 앞의 한옥상가가 위치한 재동의 음식점들이었다. 최초 혼인하여 하가한 곳은 이곳이 아니었지만 고종대에 세 공주가 하가한 집안의 후손들이 헌법재판소와 계동 현대사옥 사이의 재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회고담에서 재동학교 아래에 궁궐과 같은 큰 대문이 있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김필한이라는 인물을 매개로 여러 가지 사실을 확인했는데, 그 이후 이곳에 살았음이 확인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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