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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윤영감과 양복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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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6-20 19:58 조회5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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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감과 양복쟁이

 

 

1938년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중일전쟁이 시작 이후 1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그해 국가총동원법이란 것이 만들어졌다. 한국 사람들은 영문 모를 총동원에 쌀은 물론 각종 물자들을 일제에 빼앗기듯 내어놓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친일로 갈 게 뻔한 유명인사들을 더 대놓고 친일을 하라고 싹다 잡아가두고 겁박을 했다. 

이광수는 자기 집 대청마루에 일장기를 걸어놓고 친일로 미쳐날뛰기 시작했고, 

그 좀 전에 일제 감옥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죽을만 하니 병보석으로 풀려났던 민족의 지도자 안창호는 숨을 거두었다. 

일제 군국주의 광기의 칼춤은 장단을 본격적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엄습하는 그 어두운 공기에 질식한 듯 더욱 창백해져 갔다. 

그러한 1938년이었다. 

이 해에 풍자문학의 대가 우리의 채만식은 제목부터가 역설이고 풍자인 『태평성대』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지금이 태평성대가 아니면 언제 태평성대이겠냐”고 외치는 윤직원이라는 지주 영감이 주인공이다. 

이 영감님은 70이 넘었는데도 어린 기생 여자아이 한번 안아보려고 머리를 굴리기에 기를 다 쏟으면서 또 다 배운 놈 아들 하나 어디 군청에 넣어보려고 

소위 운동비를 여기저기 쓰고 있는 분이다. 물론 두 가지 일 다 돈이 아까와 손을 덜덜 떨면서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다시없는 태평성대의 나날에 하닐없는 이 영감님에게도 등골이 섬뜩한 무서운 존재가 그 마음 속 깊이 숨어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니 의외롭게도 말쑥한 듯 헐렁한 듯 암튼 양복을 위아래 차려 입은 ‘양복쟁이’였다. 물론 길 지나가다가 맨날 보는 양복쟁이가 아니라 자기 집 앞마당에 아무 통기없이 불쑥 나타난 ‘양복쟁이’만이 그의 트라우마를 사정없이 흔드는 것이었다.

그 ‘양복쟁이’는 세 종류가 있었다. 

젤 먼저는 3.1운동 이후 소위 ‘양복 청년’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깜깜한 밤에 불쑥 나타나 새까만 육혈포(구멍이 6개인 피스톨, 즉 영어로 하면 미국 서부 무법자들의 총, 리볼버!)을 젊었을 때 영감님 가슴팍에 겨냥하고 그 아까운 돈을 지 돈처럼 빼앗아들 갔다. 그러나 이들은 여느 강도가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지주, 부자들에게 헌납받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거부하면 육혈포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 가끔씩 육혈포가 작동했다는 사실이 신문지면을 장식도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독립운동하는 데 자금 대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한반도 땅의 사람이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때여서 이 윤영감님도 몇 번 건내주었나 보다. 아까와서 속마음은 진짜로 시리고 아팠지만서도.

두 번째 양복쟁이는 좀 시시하다. 그것은 생명보험회사 보험판매원이었다. 이때는 이름도 좋아서 보험회사 ‘외교원’이라고 불렀는데, 외교라는 것이 죽어도 국익을 챙기는 것 아닌가. 이 외교원들의 외교는 실로 능수능란하고 또 거머리라 할 만큼 집요해서, 돈푼께나 있는 사람들은 결국 아들 손자 거까지 보험을 다 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하룻밤 지난 다음부터는 먼가 속은 거 같고 다달이 보험료가 나가는 걸 보면서부터는 후회막급이 되는 것이었다. 윤영감도 몇 번 이분들 외교원과 실랑이를 벌였으면서도 끝내 이기지를 못한 게 몇 번 있었나 보다. 다달이 쏙쏙 빠져나가는 돈이 너무나 아까워 두 번째 양복쟁이도 트라우마가 되었다. 

세 번째 양복쟁이가 지금까지 긴 이야기를 끌고 오게 한 양복쟁이이다. 

육혈포 양복쟁이에 비하면 참으로 어떤 정치적 위험도 없는 순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외교원 양복쟁이이 비하면 그닥 뱀처럼 감언이설에 능란하지는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름도 딱히 정해진 건 없다. 풀어서 얘기하자면 ‘기부를 받으러 오는’ 양복쟁이이다. 이 양복쟁이가 기부하라는 것이 대개 지역사회의 교육사업 즉, ‘학교만들고’, ‘학교유지하고’ 하는 것이고 또는 한 해 끝이나 보릿고개에 못하는 사람들 구휼금 거두는 거, 때때로 있는 홍수나 화재 이재민에게 구제금 모으자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윤영감이 말하고 있는 기부 대상들을 살펴보면 모두 사회적으로 좋은 일이고, 또 지역사회나 동네, 관청 등속에 인심을 사는 일들 아닌가. 하물며 기부라는 게 기부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른 것이니 싫으면 기부 안하면 되는 것이고 심하면 기부 안 한다고 사랑채에서 내쫗으면 될 일 일텐데 어찌해서 윤영감님의 가슴이 벌렁해지고 입맛이 써지고, 혹간은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그 트라우마의 양복쟁이 중 하나가 되었단 말인가. 

여기서 조금 더 말해둘 것은 이 ‘기부 양복쟁이’들은 겉모습부터가 그렇게 위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체로 종이서류 몇장 넣을 수 있는 조그맣고 얄팍하며 손때 묵은 손가방을 들고선, 입성하고는 찌든 와이셔츠 깃에 헐렁한 바지와 닳은 구두, 이러한 사람들이었다. 

윤영감이 어떤 사람이고 한말에서부터 어떻게 해서 돈을 쌓아온 사람인데 고작 이런, 어찌 보면 허름한 양복쟁이를 보고서는 속에서 그냥 시껍을 하게 되었는가, 이제 이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한말 이래 일제시기에 특이하게 나타났던 독특한 사회현상에 대한 것이며, 그 끝자락은 지금 현재에도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맨 처음 말했던 1938년 한반도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태평성대를 부르는 윤영감을 놀라게 하고, 또 그럴 수 있음으로 해서 다시 암울한 그 시기를 이겨나가게 했던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일주일 뒤에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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